- 사건 개요-

백범 김구가 식당에서 상을 먼저 받은 일본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를 민비를 살해한 군인중 한명이라고 추정하여 살해하였다.

김구가 살해한 쓰치다의 신분이 가장 큰 논란 거리였다.

어떤이들은 상인이라고 했으며 어떤이들은 위장 군인이라고 했다.

김구에 대한 연구로 알려진 도진순 교수는 쓰치다는 평범한 상인이며

군인이라는 주장은 백범일지의 대표적인 오류라고 1997년 신문에서 밝혔다



김구, 과연 테러리스트인가?

안준생 암살 사주 - 해방전 백범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에 대한 암살을 사주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살길이 막막하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은 일제에 이토 히로부미에 행한 아버지의 행위에 용서를 구하고 당시 일본군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를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안공근 암살 의혹 -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과 백범 김구 선생은 매우 친한 사이였으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난징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내를 구해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 선생에 심한 질책을 받습니다. 또 안공근은 임시정부의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도박으로 쓴 일이 있었습니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상해에서 실종, 피살되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 -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 배후로 지목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하는 와중에서 신탁통치운동에 찬성한 여운형 암살 사건의 배후로 경찰 조사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5개월뒤 장덕수 암살 사건이 발생, 저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서게 됩니다. 미군정은 저들의 암살을 실행한 사람들 모두가 백범 김구 선생이 움직이는 조직들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인데요. 장덕수 암살 사건 당시 자기를 재판에서 빼달라고 했다가 이승만 박사가 거절한 것 때문에 오랜 지기였던 이승만 박사와 백범 김구 선생은 정치적으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6_1948_03_12_0050)



송진우 피살 사건은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자객들의 피습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다.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수석 총무가 된 송진우는 당 조직을 확대했으며, 군정에 협력했고, 그리고 망명 정객들과의 연계를 통해 정략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과 발표된 조선의 미,소 양측의 5개년 신탁통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와 견해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마찰을 빚었고, 이로 인해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생각한 한현우(당시 34세)와 유근배(21세) 두 사람에 의해 피격 암살당하고 말았다.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다. 그밖에 장택상도 송진우의 암살범으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조병옥도 김구를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신문에 게재되었으며 21면의 TOP기사입니다.21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21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2-11-19 01:48 | 최종수정 2012-11-19 02:12


●김립, 북간도·상하이 등 오가며 해외독립운동 활발

양춘산이란 이름은 중국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가명이었다. 본명은 따로 있었다. 바로 김립(立)이었다. 김립은 1919년 11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취임했다. 임시정부의 재정과 인사를 비롯한 모든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거물급 인사였다. 비서장은 국무원 각부 차관회의를 주재했다. 임시정부의 운영 전반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가진 직책이었다. 김립은 1920년 9월 15일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임시 정부 경무국장 김구(九)는 그의 죽음에 대해 짤막하게 논평했다. 통쾌하다는 말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백범일지’를 보면 “정부의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吳冕稙), 노종균(宗均) 등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통쾌해 하였다.”고 한다. 불과 1년 5개월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상관이자 혁명 동지였던 사람에게 그처럼 독설을 퍼붓는 이유는 피살자를 ‘정부의 공금 횡령범’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김구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최상급 지도자들도 김립을 규탄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申圭植)을 비롯한 6인의 각부 총장들이 연명으로 발표한 1922년 1월 26일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보자. 그에 따르면 김립은 이동휘(李東輝)와 더불어 온 나라 사람들이 규탄할 만한 죄를 지었다고 한다.


●‘양춘산’ 가명으로 中 입국… 12발 총탄 맞고 피살

김 립은 극형에 처해야 할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 해당 구절을 읽어 보자.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드디어는 국가 공금을 횡령하여 개인 주머니를 살찌우고 같은 무리를 불러 모아 공산이란 미명하에 숨어서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초점은 국가 공금을 횡령하여 자기네 당(공산당)만을 위해 사용한 점에 있었다. 이동휘는 그 범죄를 교사한 자로 지목되었다. 국무총리 재임 중에 소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공한 거액의 자금을 김립으로 하여금 횡령케 했다는 것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설립 때부터 경무국장에 취임한 김구는 재임 5년 동안 20여명의 요원을 거느리며 경찰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보통 경찰행정과는 달랐다. 경무국의 주요 임무는 일본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는 데에 있었다. 살벌하고도 냉엄한 비밀경찰의 임무였다. 김구가 지목한 오면직과 노종균은 바로 그 경무국 소속의 비밀 요원이었다.


●김구 말대로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이었나

김립은 과연 공금횡령범이었는가? 암살 집행의 사유가 된 이 문제는 여태까지 객관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었다. 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과연 사실에 부합한 것인지 확증된 적이 없었다. 한번 따져 보기로 하자.

김구가 말하는 ‘정부 공금’이란 소련 정부가 제공한 무상원조 60만 금화루블을 가리킨다. 이른바 모스크바 자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60만 금화루블은 2012년 오늘의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소련은 이 자금을 두 차례에 걸쳐 제공했다.

첫 번째로는 1920년 9월 박진순(朴鎭順)에게 40만 금화루블이 인도되었고, 두 번째로는 1921년 9월 베를린 주재 소련대사관을 통하여 한형권(韓馨權)에게 20만 금화루블이 제공되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자금 제공처는 소련 외무부였다. 문제의 핵심은 이 자금의 처분권자가 과연 누구냐 하는 데에 있었다.

김립이 피살될 당시 현장에는 3인의 동료가 함께 있었다.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가 그들이다. 다들 상하이파 공산당의 간부들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김철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현장 수습을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고 신속히 모스크바 자금이 예치되어 있던 은행으로 가 남은 자금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 놓는 일을 수행했던 사람이다.

또한 김립에 이어 당의 재정부장으로 취임하여 모스크바 자금을 직접 관리했다. 그래서 김철수는 다른 누구보다도 모스크바 자금의 내막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자금이 결코 임시정부 공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스크바 외교를 수행한 박진순과 한형권은 둘 다 한인사회당의 전권대표 자격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따라서 한인사회당과 그 계승자인 상하이파 공산당이 그 자금을 관리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소련 옛보고서 “상하이 공산당 횡령근거 없다” 결론

김철수의 주장은 임시정부측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구는 무고하게 한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셈이 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가? 소련 정부는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었던 것일까?

우리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자료들이 최근 구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되었다.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 쿠시넨이 1922년 5월 11일자로 작성한 훈령이 눈길을 끈다.

이 문서에는 문제의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이 모두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자금의 결산 보고 의무도 상하이파 공산당에 부과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국제공산당은 모스크바 자금의 정산 실무를 극동공화국 외무대신 얀손에게 위임했는데, 그가 주도한 자금결산규명위원회가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은 1922년 8월 18일이었다. 이 보고서도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지목했다.

보고서 결론에 따르면 상하이파 공산당의 자금이 사적으로 유용되었다는 여러 가지 악평은 소련 영토 내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코민테른 문서들은 어느 것이나 다 모스크바 자금의 처분권자가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자인 상하이파 공산당이라는 점을 뚜렷이 하고 있다. 김철수의 주장이 객관적으로도 실제에 부합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본명 김익용…‘입헌’의 한 글자 따 김립으로 개명

김립의 본명은 김익용(翼瑢)이었다. 그가 김립이라고 자임한 것은 대한제국 시절이었다. 전제군주제 하에서는 근대적 개혁과 독립의 보존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두 명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있었다.

두 청년은 입헌제도 수립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를 기념하여 그들은 설 립(立)자와 법 헌(憲)자를 한 글자씩 나눠 가졌다. 김익용은 김립이 되었고, 또 한 청년은 본래 자신의 성명인 허헌(許憲)의 의미를 재규정했다.


김립은 나라가 망한 뒤로는 해외로 망명하여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북간도, 연해주, 흑룡주, 베이징, 상하이를 분주하게 오가던 그를 가리켜 일본 헌병대는 ‘배일흥한(排日興韓)을 기도하는 유력자’라고 지목했다. 그는 뛰어난 지능과 조직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책사(策士)이자 재주와 인물이 제1류의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그랬던 김립이 ‘공금 횡령범’이라는 불명예 속에 지금도 갇혀 있다. 사후 90년 동안 김구가 찍어 놓은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 늘날에도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에서는 임시정부 공금 횡령자라는 낙인 때문에 그의 서훈 상신이 번번이 기각되고 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를 억누르고 있는 허위의 낙인을 지워 내고, 그 자리에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국화를 독립운동의 제단에 놓아야 할 때이다.



기사입력 2007-04-17 08:09 | 최종수정 2007-04-17 08:09

[한겨레] 이완용 테러를 막다가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무고하게 죽은 일본인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남북한 관련 기사들을 꼼꼼히 찾아야 하는 직업상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을 두루 보지만 가끔 거의 억지로 볼 때가 있다.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을 ‘반군’(insurgents)이라고 지칭하는 글들을 보는 것이 역겹기 때문이다. 의병이나 독립군 유격대들을 ‘폭도’라고 지칭했던 일제 어용지들과, 저 미국의 일간지들이 무엇이 다른가? ‘합방’ 전후의 조선과 오늘날의 이라크의 차이라면, 전자는 무기와 병사들이 태부족해서 무장 독립운동으로 외적을 내몰 힘이 없어 국민국가를 끝내 만들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데 반해 후자는 후세인 시절 정규군의 장비와 인력을 물려받아 침략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힐 힘을 가진 것이다. 물론 절대적 도덕 차원에서는 어떤 폭력도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적어도 국제법 차원에서 따져본다면 유엔 헌장(제2조 4항)을 위반하는, ‘침략’이라는 국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군인이나 현지 부역자들에 대한 저항세력의 공격은 ‘반군의 테러’라기보다는 방어권의 행사일 뿐이다.

‘나라를 위한 일’에 평민 하나쯤이야?

그런데 침략군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공격이 정당방어라 해도, 이것이 과연 문제없는 방어 수단인가? 지금 이라크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공격들의 효과가 세계 초강대국의 침략·식민화 계획을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클 수 있지만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미군을 표적으로 하는 많은 공격에서, 그저 그 자리에 우연히 있던 이라크 양민들이 무고하게 죽고 다친다. 아무리 ‘약자의 저항’이라 해도, 폭력이란 과연 늘 완벽하게 의도대로 실행될 수 있는가? ‘정당한 폭력의 무고한 희생자’ 문제에, 한국 독립운동도 일찍 부딪치게 됐다.

1909년 12월22일, 젊은 기독교인 이재명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회에 참석했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제1호 매국노 이완용에게 ‘정의의 칼’을 겨누었다. 이완용이 중상을 입었음에도 살아남게 된 이유는, 이재명의 길을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았기 때문이다. ‘매국’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평민 박원문이 이재명의 다급한 칼에 찔려 죽었고, 이완용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완용에 대한 이재명의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매국노를 인력거에 태워준 죄(?) 이외에 별다른 죄를 저지른 일이 없던 박원문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정의인가? 일제는 일제대로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이완용의 암살미수건만으로 사형을 받을 수 없던 이재명에게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다.

이재명이 공판에서 박원문을 죽인 것이 ‘우연’이었음을 강조하고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무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목숨을 잃는 것은 당시에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별다른 고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이재명 의거’에 대한 기억에서 박원문의 죽음을 꼭 빠뜨려야만 하는가?

외적의 괴수 곁에 우연히 섰다가 민족 투사의 의탄(義彈)에 맞아 무고하게 쓰러지는 ‘의도되지 않은 희생’의 문제는, 그 뒤에도 한국 독립운동에 어두운 그늘을 계속 드리웠다. 예를 들면 아나키즘 경향의 ‘직접 행동’ 단체인 의열단이 1922년 3월28일 상하이 부둣가에서 일제의 해외 침략정책의 입안자였던 다나카 기이치(1864~1929) 남작에게 총탄과 폭탄 세례를 준비했는데, 여의치 않게 다나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채 총소리에 놀라 다나카를 껴안은 브라질 출신의 미국 여성 스니더 부인을 오살하고 몇 명의 미국인, 영국인, 중국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다가 아무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스니더 부인의 참사는 상하이의 외국 조계를 경악게 해 한국 독립운동 전체에 대한 탄압 강화로 이어졌다.

김구 부하가 ‘정당하게’ 살해한 김립

그런데 중국을 무대로 한 무장 독립투쟁에서 중국인이나 외국인이 우연히 희생됐을 때 여론 악화가 뒤따르곤 했지만, 한국 쪽에서도 중국 쪽에서도 특히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 민간인의 피해에 별다른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예컨대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때 일본인 사진기자를 비롯한 수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침략 원흉들의 폭살과 부상에 기뻐하고 있던 중국 여론은 이를 인식하지 않았다. 테러로 피해를 입어도 피침 지역의 현지인들에게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침략적 야심을 견제할 줄 모르는 ‘말 잘 듣는’ 침략국 민중이 받는 집단적 업보라 할까? 미 제국의 ‘공범’이 되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자국의 시민이 현지 저항세력의 손에 죽은 것을 이미 본 바 있는 한국 국민으로서도 심각하게 성찰해볼 만한 대목이다.

‘무고한 희생자’의 문제와 함께 저항 방법으로서의 테러를 의심케 하는 부분은, 폭력이 일상화되면 저항 주체 사이의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도 전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적과의 싸움의 역사’로 보지만 실제로는 독립투쟁에서도 내부적인 권력 쟁투 양상이 적지 않았으며 때로는 폭력적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동류를 향한 폭력의 주체가 저명한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과연 그 폭력이 무조건 선한 것이던가?

예를 들어,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이다.

저항 집단이 만들 독립국가의 모습은

70여 년 전, 한국 공산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박헌영은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면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의 폭력에 의한 운동이 필히 패배한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의 이라크 상황을 본다면 윤봉길과 비슷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있는 무장 투쟁이 성공할 확률도 적지 않지만, 과연 소수의 저항 집단이 만드는 독립국가는 민중적, 민주적, 인권적 모습을 띨 것인가? 최고의 빨치산 대장이 결국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한 한반도 현대사의 교훈을 염두에 둔 필자는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의 성공적 투쟁에 대해 기쁨과 함께 일정한 염려를 느끼고 있다.

참고 문헌

1.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반병률,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2집, 63~103쪽, 2005.

2. ‘1920년대 전반기 의열단의 민족 운동과 노선 추이’ 김영범, <사회와 역사> 제34권, 97~177쪽, 1992.

3. ‘의사 이재명의 삶과 죽음’ 김삼웅, <문학과 경계> 제11호, 419~436쪽, 2003.

4. <이완용 평전> 윤덕한, 중심, 1999.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79592534&qb=6rmA6rWsIOyTsOy5mOuLpCDsuZjtlZjtj6w=&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T58XcdpVuEKssaR5ZThssssssus-151013&sid=XeedcVjodlvNd4KFhzk/TQ%3D%3D


김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셨고, 기둥이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치하포 사건은 명백한 살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찔러 죽였다는 말이지요.

어라 이상하다? 분명 김구 선생님의 위인전이나 전기를 보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살해한 왜놈 장교를 멋지게 무찌르셨다고 적혀있는데?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구 선생님이 살해한 쓰치다 조스케라는 일본인은 육군 중위도 아니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도 아닌 단순한 '약장수'였다는 것입니다.

기록을 볼까요?


'제국민서조해에 관한 조선정부와의 교섭월일표' 라는 문서입니다.

일본 측에서 자국민에게 위해를 가한 조선인에 대한 처벌과 그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문서인데요.

저 문서의 살해(殺害)란을 보시면 土田讓亮 (쓰치다 조스케)라는 이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 문서에서는 쓰치다를 '약장수(賣藥商)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 측의 기록이니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으실 수도 있으실텐데
김구 선생의 주장대로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의 자객, 일본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백범일지 외에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백범일지는 일기이기 때문에 공신력이 있는 문서라고 하기에도 곤란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국내의 학자들은 김구 선생이 살해한 쓰치다를 '단순한 상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1997년 창원대 도진순 교수님께서는 외무성 자료를 참고했을 때 무역 목적으로 입국한 민간인이 맞다고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에서 서술하신 바 있고,

전 국회의원 손세일씨 역시 쓰치다는 단순한 상인이었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치하포 사건에 대한 조서로 글을 마치려 합니다.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백범일지에 서술한 것과는 달리, 주막에서 자기보다 먼저 밥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살해했음을 알 수 있음)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85757392&qb=6rmA6rWsIOyTsOy5mOuLpCDsuZjtlZjtj6w=&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


치하포에서 김구가 살해한 쓰치다 죠스케는 을미사변과 연관없는 그냥 민간 일본인이였습니다.

김구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 주장했지만 어떤 사료에도 그가 중위임을 입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쓰시마 출신 상인으로 약제상에 고용되어 조선에 장사하러 왔다가 을미사변으로 인해 조선내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안전을 고려해 일본으로 돌아가던 길이였습니다.

그는 안전을 고려해서 일본인임을 숨기기 위해 조선인으로 변복했으며, 일본 정부가 제시한 "조선 여행시의 안전지침"에 따라 호신용 환도를 패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배편으로 인천으로 가서 거기서 일본행 선박에 오를 작정이였지요.

그런데 이게 화를 부른겁니다. 쓰치다가 인천으로 가는 뱃길 도중 아침 식사를 위하 머무른 주막에는 동학당의 젊은 리더 김창수(훗날의 김구)가 있었습니다. 

동학당은 우금치 전투 이후 각지에 산개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지만 동학당에 몸담으면서 전투를 경험한 바 있었으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던 인물이였습니다. 거기다 을미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어느때보다 격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김창수의 눈에 어설픈 쓰치다의 변장은 되려 주목을 끌고 말았습니다. 영민한 김창수는 그가 변장한 일본인이라는걸 단번에 간파했습니다. 그런 김창수의 눈에는 쓰치다는 조선인 행세를 하는 수상한 일본인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지요. 
혈기 넘치는 김창수는 그가 조선인으로 변장한 까닭은 신분을 숨겨야하는 일본의 스파이거나 을미사변과 관련된 관련자일 것이라 판단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이 서자 주저않고 쓰치다를 공격해버린거죠. 

쓰치다는 비록 환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김창수의 갑작스런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고, 평범한 민간인이였던지라 동학당에 몸담으며 전투를 경험한 혈기 넘치는 20대 젊은이를 제압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한 김창수의 무차별 공격에 쓰치다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지요.

이는 정의로은 의거거나 정당한 복수일 수 없습니다. 오해와 증오가 빚은 어이없는 비극이였지요.